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시오스 3세 (문단 편집) === [[4차 십자군]] === 4차 십자군이 닥쳐온 당시에 동로마군의 대응이 미흡하거나 부족하였다고 논해지지만, 알렉시오스 3세가 망명을 떠나기 이전 시점과 이후는 구분해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1202년 11월 26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알렉시오스 4세를 지원하는 군대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콘스탄티노플 정부는 1203년 5월에 디라히온에서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4세를 노출시킨 다음에야 관련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해 6월 23일이었다. 정보가 전해지는 시간을 고려해본다면 사실상 한달이 안 되는 정도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알렉시오스 3세와 정부 각료들은 혼란에 빠지지 않고 군대를 수습하는데 노력했다. 서로 정세를 관망하던 양군은 7월에 들어 전쟁에 돌입했다. 동로마군은 베네치아의 압도적인 함대 전력에 위압을 느끼면서도 갈라타 상륙 작전 시작 무렵에 상당히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 또한 이후 갈라타에서 퇴각하였을 때도 갈라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로 이어지는 석조 다리 요새를 초전에서 지켜냈다. 최종적으로 시내로 후퇴한 뒤에도 동로마군은 수시로 성 밖으로 나와 십자군의 진영을 습격하였다. 십자군은 7월 17일, 양동공세를 계획하여 제국군 주력을 육로로 끌어낸 뒤 해군으로 수도를 점령하는 작전을 세웠다. 알렉시오스 3세는 양동공세 계획을 듣고 이들의 작전을 간파했지만 관료, 귀족, 상류 시민들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육로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참호를 파고 수세로 일관하던 그는 해안 성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퇴각, 베네치아의 상륙군을 압박하여 큰 피해를 강요하였으며, 결국 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직후 베네치아를 위시한 십자군이 동로마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불을 지르면서 콘스탄티노플에 대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결정적인 승리로 부각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알렉시오스 3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시민들의 절망을 지켜보면서 외부로부터 구원군을 끌어오지 않는 한 희망이 없겠다고 판단하였다. 호니아티스의 초기 연대기 판본에서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황제는 '도시들의 여왕'의 참담한 불운을 목도하고 인민의 근심을 지각하게 되어서야 군인이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적군의 기세가 더욱 등등하며 더럽혀진 도시를 위한 어떤 도움도 오지 않는다는 데 대해 분노하고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이제 군대의 심약함과 용기 및 과단의 결핍이 도시를 뒤덮어버림으로서 이 도시는 운명의 폭력 가운데에서 안쓰러운 시신이 되었다. ... 알렉시오스는 황궁으로 들어가면서 시간으로 변화를 꾀하여야 할 것임을 그리고 위험하게 위협의 파고에 저항할 필요는 없음을 깨달았다. -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